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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 낯설음에 대하여

by 고전음악연구소장 2020. 8. 2.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를 처음 접한 것이 언제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음반을 통해 접한 것이 아니라, 레슨 시간에 곡을 먼저 배웠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레슨이 성악레슨이었는지, 가곡반주레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성악레슨 때도 노래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끼리 서로 반주를 해주어야 했고 가곡반주레슨 시간에도 마찬가지로 서로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전체 곡을 다룬 것은 아니고 Gute Nacht, Lindenbaum, Frühlingstraum 등 몇몇 곡들만을 공부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접한 곡이 마음에 들어 처음 샀던 음반이 피셔-디스카우와 제랄드 무어의 EMI반이었다. 그러나 이 음반은 처음에는 그리 즐겨듣지 못했는데 당시에는 디스카우의 해석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지금은 가장 좋아하는 음반 중 하나다). 그러다가 바렌보임과 크바스토프의 DVD를 접하고 거기에 한동안 푹 빠졌었다. 나중에는 햄튼이나 괴르네, 보스트리지 등의 음반 역시 좋아하게 되었다.

 

얼마 전 다시 이 곡을 듣다가 곡의 첫 소절에서 갑자기 깨닫게(!) 된 게 있어서 이 글을 포스팅하게 되었다. 바로 겨울나그네의 첫 곡인 'Gute Nacht'의 첫 소절  "Fremd bin ich eingezogen, fremd zieh ich wieder aus"라는 가사가 바로 곡의 전체 주제를 요약하고 있다는 것이다!

 

 

 

Winterreise의 첫 곡인 Gute Nacht의 첫 소절

 

피아니시모로 조용히, 그리고 거의 움직임이 없이 화음반 바꿔가며 연주되는 반주형은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가는 나그네의 발걸음을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마치 보이는 것처럼 들려오는 그의 발걸음 소리는 적막하고 쓸쓸하다. 원하지 않는 여행을 떠나며 그는 그가 사랑했던 소녀의 집 앞에서 아무도 듣지 않는 작별인사를 고하고 있다. 이 작별 인사에 앞서 나오는 그의 독백이 바로 첫 소절의 가사다. "낯선 곳으로부터 온 나는, 낯선 곳으로 다시 떠난다."

 

내 생각에 이 연가곡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낯설음'(Fremd)에 대한 것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여 가는 곳마다 이방인이 되는 나그네. 그는 미지의 어딘가로부터 왔다가 다시 떠난다. 그런 의미에서 흔히 오역으로 알려진 이 가곡의 제목 겨울'나그네'는 내 생각에 오역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초월번역으로 볼 수 있다. 직역하면 겨울나그네가 아니라 겨울여행이 되겠지만, 직역된 제목에서는 이 이방인으로서의 정서가 느껴지지 않는 것 같다. 나그네라는 단어가 가진 황량함, 쓸쓸한 낭만 등이 오히려 곡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주고 있는 것 같다.

 

독일어는 단어의 배치 순서가 의미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영어와는 달리 문장요소들의 도치가 자유로운 편이다. 그래서 강조하고자 하는 단어를 문장의 앞으로 끌고 오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이 가사의 경우에도 시인은 Fremd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두 번 다 문장의 맨 앞에 놓아 강조하고 있다. 슈베르트 역시 이어진 두 문장의 처음에 배치된 Fremd라는 가사에 의도적으로 프레이즈 중 가장 높은 음을 써서 이 단어가 가진 중요성을 표현하고 있다.

 

곡 전체의 구성도 이 첫 소절의 가사를 반영하고 있다. 첫 곡 'Gute Nacht'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곁을 떠나며 여행을 시작한 나그네는 마지막 곡 'Der Leiermann'에서도 여전히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한 채 방랑을 계속하고 있다. 끊임없이 낯선 곳에서 낯선 곳으로 여행하고 있는 것이다. 겨울나그네의 전체 24곡은 이 여행 중에 나그네가 겪는 일, 나그네의 심정과 그의 생각 등을 다각도에서 묘사하며 이 낯설음의 정서, 이방인의 정체성으로 청자들을 인도한다. 집중해서 다 듣고 나면 나도 모르게 절로 한숨이 푹 나오며 깊이 있는 우울감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크바스토프와 바렌보임의 겨울나그네 실황 영상 /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