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리히터를 둘러싼 단상

by 고전음악연구소장 2020. 8. 7.

예전에 한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에게 빠져 그의 음반을 보는 족족 사모으던 때가 있었다. 돌아보면 당시 학생이었기 때문에 넉넉치 못한 주머니 사정으로 인해 음반을 그리 많이 살 수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의 음반이 보일 때마다 위시리스트에 넣어놓고는 용돈이 생길 때마다 그 목록을 하나씩 지워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산 음반들을 질리도록(결국 질린 음반은 여전히 하나도 없지만) 듣고 또 들었다. 때문에 당시 리히터의 연주로 처음 접한 레퍼토리들도 적지 않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들이 슈만의 작품들이다. 리히터가 녹음한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이나 환상곡 등의 음반은 여전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음반들 중의 하나다.

 

최근에 이사를 준비하면서 오래도록 듣지 않았던 음반들을 정리하며 하나씩 들춰보게 되었는데 그 중 리히터의 피아노 협주곡 음반이 나왔다. 그리그와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이 커플링 되어 있는 음반인데, 두 곡 모두 지금 들어도 여전히 큰 감동을 주는 호연이다. 이 두 곡 외에도 한 곡이 더 보너스 트랙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바로 슈만의 '나비'이다.

 

나는 다른 슈만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나비' 역시 리히터의 연주를 통해 처음 접했다. 슈만의 초기 피아노 음악이 가지는 주요 특징 중 하나인 매혹적인 악상의 연속적 전개가 무척 인상 깊었다. 이 곡은 곧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 중의 하나가 되었고 작품에 푹 빠진 나는 오래 지나지 않아 작품을 직접 연습하기에 이르렀다.

 

GROC 시리즈로 나온 리히터의 그리그 / 슈만 피아노 협주곡 음반. 보너스 트랙으로 슈만의 빠삐용이 수록되어 있다.

어떤 작품을 연습할 때는 가급적 그 작품의 녹음을 듣지 않는다. 혼자 악보를 마주하고 앉아 고민해보기도 하고 피아노 앞에서 직접 소리를 하나하나 듣고 작품을 들여다보며 작곡가의 의도를 읽어내고, 그에 대한 나의 생각과 감정들을 표현하는 방식들을 찾아서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이 이미 완성하여 내놓은 해석을 듣게 되면 거기에 휩쓸리게 되기 쉽다. 그래서 공부하는 작품의 음반들을 들어보는 것은 내 나름의 해석이 어느 정도 자리잡히기 시작하는 연습의 마지막에 가서야 하게 되는 작업이다. 특히나 리히터처럼 강한 설득력을 가진 해석을 들려주는 피아니스트의 연주는 더욱 피해야 한다. 그래서 슈만의 나비를 연습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몇 달 동안 리히터의 녹음을 듣지 않았다.

 

곡의 세부적인 화성의 흐름, 내성의 미묘한 진행, 악상들 간의 관계 등을 파악하고 어느 정도 곡이 손에 익었다고 느끼기 시작할 무렵, 다시 리히터의 연주를 들어보고는 놀랐다. 리히터의 연주에 전혀 동의하지 않고 있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리히터의 연주는 물론 여전히 훌륭했지만, 나에게 있어서 더이상 '옳은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피아노의 영역에 있어서는 거의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리히터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나의 해석은 맞고 그의 해석은 틀리다'라는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내가 도달한 결론이 그가 보여준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음악을 감상할 때, 어떤 시대나 스타일, 혹은 작곡가에 대한 나름의 견해를 갖게 되기 전까지는 어떤 곡이든 첫 번째로 듣게 되는 연주가 대개 그 곡의 해석에 대한 시금석이 되곤 한다. 일종의 각인 효과 같은 것이다. 물론 첫 번째로 들었다고 해서 무조건 그게 표준이 되는 것은 아니고 좀더 정확하게는 각인이 될만큼 많이 들은 첫번째 녹음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당시 나에게 있어서 슈만의 나비에 대한 표준은 리히터였다. 그런데 그게 완전히 뒤집힌 첫 번째 사례가 된 것이다. 처음에 좋아하던 녹음을 나중에 가서 조금 덜 좋아하게 되는 경우는 있었어도 그렇게 부정하게 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말하자면 우상이 깨진 느낌이랄까.

 

우상의 깨어짐에서 처음에는 당혹감을, 이어서는 해방감을 느꼈다. 소위 '대가'들의 연주에 그 이름만으로 먼저 압도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 이후 음악을 듣는 방식에 서서히 변화를 겪게 됐다. 소리 자체보다는 텍스트에 우선순위를 두고 듣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텍스트가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에 대해 알아갔다. 악보를 보며 다양한 소리를 상상하는 방법에 대해서, 여러 스타일에 따라서 연주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다보니 소리를 듣는 폭 자체도 더 넓어질 수 있었다. 약간 말장난 같기도 하지만, 이전에는 음악을 들을 때 '그래,  그렇구나.'하면서 들었다면 그 이후에는 '그래? 정말?'이라고 하면서 듣게 되었다고 할까? 해석자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 보면서도 거기에 무조건 수긍하진 않게 되었다.

 

어쨌든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리히터를 사랑한다. 그의 연주는 여전히 강한 설득력으로 나를 매혹시킨다. 비록 이제 그가 나에게 더이상 '옳은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사랑하는 것'까지 아닌 것은 아니다. 이성적인 동의와 본능적인 끌림은 다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