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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고전음악 애호가가 되었는가?

by 고전음악연구소장 2020. 3. 2.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 넥스트(N.EX.T)를 처음 접했다. 바로 열렬한 팬이 된 나는 넥스트의 곡들을 전부 외울 정도로 매일 듣고 다녔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라 애초에 넥스트가 무슨 음반들을 발표했는지도 몰랐고 또 어떤 음반이 있는지 알았다고 해도 살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발품을 팔아 음반가게마다 찾아다니며 넥스트의 음반을 보유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혹시라도 새로운 음반을 발견하면 즉시 사들고 집으로 와 한참을 듣곤 했다.

 

처음 접했던 넥스트의 음반, 4집.

그러던 중 어느 날엔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클래식이 그렇게 좋은 음악이고 고급 음악이라는데, 한 번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별 생각 없이 곧잘 가던 음반 가게에 방문해서 아는 작곡가의 이름 하나를 댔다.

 

"베토벤 씨디 있나요?"

"베토벤 씨디요? 어떤 거요?"라고 점원이 되묻자

아는 악기가 피아노 밖에 없었던 나는

"베토벤 피아노 곡 유명한 거 아무거나요."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점원이 내게 건네준 씨디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명연주 모음이었다. 정확한 음반명은 기억 안 나는데 대강 그랬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들 중 특히 유명하고 사랑받는 곡들을 두 장의 씨디에 담아놓은 음반이었다. (거의 십 년 정도 후에 다시 앨범을 보니 피셔의 '전원', 아라우의 '고별', 리히터의 '열정' 등 전설적인 연주들은 다 모아놓은 가성비 음반이었다.)

 

별 생각없이 집에 와 쭉 들어보았다. 처음엔 곡에 익숙해지려고 배경음악처럼 틀어놓고 들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 날엔가, 어느 한 악장이 가슴에 파고드는 순간이 왔다. 23번 소나타 '열정'의 3악장이었다. 연주자는 리히터(Sviatoslav Richter). 피아노 한 대로 락밴드 전체가 연주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불타오르는 강렬한 연주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아직 학생이라 금전적으로 여유는 없었지만 그 날 이후로는 용돈을 모으는 족족 클래식 음반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에서 시작하여 교향곡까지, 베토벤에서 시작하여 바흐, 쇼팽 등을 거쳐 말러, 쇼스타코비치까지.

 

아! 나중에야 알게 된 건데, 넥스트를 처음 접했을 때 날 놀라게 했던 그 곡은 홀스트의 '행성' 중 첫 곡인 '화성'을 락밴드를 위해 편곡한 버전이었다. 지금 다시 들어봐도 무척이나 뛰어난 편곡이다. 그러고보니 넥스트를 좋아하게 된 계기도 클래식 곡이라는 사실이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