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에서 리히터의 연주는 강한 설득력을 가진다(2020/08/07 - 리히터를 둘러싼 단상)고 했는데, 좀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그의 연주는 설득을 강하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청자에게 그의 해석을 거의 강요(?)하는 수준이다. 당연하게도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은 아니지만 거의 그렇다고 느껴질 정도로 자체적인 완결성이 뛰어나다. 이것이 그의 연주를 특별하게 만드는 점이다. 그와 같은 정도의 설득력 있는 연주를 하는 피아니스트는 거의 없다(최근에는 그리고리 소콜로프가 이러한 면에서 그의 뒤를 잇는(?) 피아니스트로 느껴지긴 한다).
미켈란젤리나 코롤리오프 같은 연주자들은 음 하나하나에 대한 완벽한 통제를 통해 흠잡을 수 없는 연주로 청자를 압도한다. 페라이어는 따스한 노래를 통해 마음을 녹이고, 플레트뇨프는 기발한 아이디어(일반적으로 다른 피아니스트들은 상상은 해볼 수 있다 해도 구현은 할 수 없는)를 통해 귀를 잡아끈다. 리히터는 물론 놀라운 테크닉과 세부적인 표현도 놓치지 않는 연주에 대한 통제력을 모두 갖추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의 연주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설득력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강한 설득력은 적어도 '연주자'에게 있어서는 양면성을 가진다. 예술이라는 것은 기존에 존재하는 세계의 투영이나 그에 대한 탐구인 동시에, 작은 세계의 창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자기가 내놓는 작품 안에서 일종의 창조자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체적인 논리의 완결성이라는 요소는 어떠한 작품의 완성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런 면에서 리히터의 연주와 같이 자체적이고 폐쇄적인 논리적 완결성으로 인해 강한 설득력을 가지는 연주는 완성도 높은 예술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더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연주자는 그 자체로 독립된 세계를 만드는 창조자로서의 예술가라기보다는, 이미 완성된 예술작품을 표현하는 전달자라고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전달자에게 중요한 것은 창조자의 의도를 전달하는 매개로서의 역할이다. 이때 매개가 지나치게 강력한 의도를 가지고 자신만의 폐쇄된 세계, 혹은 색깔을 가지고 있다면 창조자의 의도는 제대로 전달될 수가 없다. 필연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리히터의 연주가 가지는 강한 설득력이 이와 같다. 간혹 그의 색깔이 마침 그가 연주하는 작품과 맞아떨어질 때는 엄청난 시너지를 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작품보다도 오히려 그가 전면에 나서게 되어 그는 불완전한 전달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열정' 연주이다(2020/03/02 - 나는 어떻게 고전음악 애호가가 되었는가?).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저 다소 아카데믹한 차원에서의 이야기일 뿐이다. 예술은 학문의 대상이 될 순 있지만 그 자체로 학문은 아니다. 바로 위에 언급한 그의 '열정' 녹음에 대해서도, 음악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난 그 연주를 '옳다고' 할 순 없지만 기꺼이 들을 것이다. 다른 연주보다도 더욱 열렬히.